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프 란다우 (문단 편집) === 소련 귀국 === 1931년 서유럽에서 레닌그라드로 돌아와서 1931년 레닌그라드 물리 기술 연구소에서 일했고, 1932년 하르코프로 옮겨서 그곳의 새로 조직된 우크라이나 이공학 연구소의 이론 부의 책임자가 된다. 동시에 그는 하르코프의 물리학 기술연구소와 Mechnic Building 연구소의 책임자였다. 1934년 그는 그의 학위논문에 대한 Defend 없이 수학과 물리분야의 박사학위를 받게 되고, 1935년 교수가 된다. 하르코프에서의 기간은 란다우가 가장 심도있고, 다양한 연구활동을 한 시기로 그 당시 란다우의 과학적인 활동의 범위는 그가 한 공부의 목록을 보면 이해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1936년 한 해동안에 공부한 것이 일종 위상 변환 이론, 초 전도체의 중간 상태 이론, Coulomb interaction에서의 운동 방정식, 단원자 분자의 상호 작용 이론, 저온에서의 금속의 특성, 소리의 확산과 흡수 이론, [[초전도체]]에서의 [[광전효과]] 이론 등이 있다. 또한, 그가 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도 역시 하르코프이고, 그곳에서 소위 '이론기초(theoretical minimum)'의 프로그램을 시도하게 되는데, 이것은 이론 물리학자가 되기 위해서 갖추어야 하는 기본적인 것을 테스트하는 것으로 모두 9가지의 시험으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 두 개는 입학시험과 같이 작용하는 것으로 미적분, 텐서해석, 군론 등과 같은 것에 대한 시험이고, 나머지 일곱 개는 란다우 강좌의 대부분에 해당하는 물리분야에 관한 것을 테스트하는데, 란다우가 이 프로그램을 하는 기간동안 단지 43명의 사람만이 통과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란다우의 관점에서 제대로 물리학을 할 자격을 갖춘 사람이 적었다는 얘기가 될 것이다.[* 이 시험을 통과한 사람중 일부는 시험을 통과하는데 모든 기력을 쏟은 관계로 바로 물리학계에서 사라진 사람이 많았지만, Pomeranchuk, Lifshitz, Khalatnikov, Abrikosov와 같이 빠르게 성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또한, 하르코프에서 그는 '이론 물리학 강좌'와 '일반물리학 강좌'의 전반을 만드는 것을 시작하여 Lifshitz와 함께 공동작업하여 1950년경에 '이론물리학 강좌'라는 4000페이지에 달하는 8권의 방대한 책을 완성하게 된다.[* 아래 저술 목록 참고.] 1937년 봄, 란다우는 모스크바로 옮겨 표트르 레오니도비치 카피차(1978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의 건의로 설립된 물리문제 연구소 이론 부분의 책임자가 되어 그의 인생이 끝날때까지 그곳에서 지내게 된다. 이곳에서는 그의 다양한 활동이 그 성과를 거두는 시기로, 실험 물리와의 깊은 상호협력으로, 그의 인생에서 가장 대표적인 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 quantum fluid 의 이론을 만들어 내게 된다. 이 란다우의 초유동 이론은 관찰된 현상을 정확하게 설명해줄 뿐만 아니라, 후에 실험에서 밝혀지게 된 새로운 현상을 예견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